top of page

사진에 넣을 시그니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손글씨 싸인을 넣어 보았다. 사람들마다 바꾸길 잘했다 말해준다. 내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행사장 수백 명 앞에서 펼쳐지는 프리젠테이션에서 보여지는 내 사진 속 서명을 보고는 아무 이유도 없이 한참을 울었다. 바꾸길 잘했다만 만인들 앞에 있는 사진 속의 내 서명을 대할 때면 솔직히 나 자신도 가끔은 낯부끄럽기만 하다.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뻔뻔함이다. 아니 이제는 내 서명이 빠진 내 사진은 내 사진답지 못하다. 어려서부터 내 글씨는 종적을 알 수가 없는 글씨체였다. 붓글씨 같은 정자체를 쓰는가 하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기울었다가 어느 때는 네모난 글씨였다가 어느 때는 길쭉한 글씨였다가 또 어느 때는 둥글넓적한 글씨였다가 심지어는 지렁이 똥 싼 듯한 흘림체였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보면 과연 이게 내 글씨였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수십 번을 바꾸던 내 글씨체가 이제야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한다. 글씨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만년필이 아니면 글씨 쓰기를 거부해 왔고 당장 컴퓨터가 눈앞에 있어도 굳이 노트에 글을 쓰고 나서야 타이핑으로 글을 옮기기도 해 왔다. 스튜디오 공간의 온 사방을 메워가고 있는 포스트잇 메모지들에는 빼곡히 내 글씨들이 춤을 추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는 점차로 컴퓨터로만 하던 디자인을 손으로 직접 하기 시작했다. 어설픈 컴퓨터의 폰트보다는 내 글씨가 낫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캘리그래프 작업을 시작했다. 수백 번이고 같은 글씨를 반복해가면서 가장 좋은 필체와 힘을 가진 글씨를 또 다시 반복해가면서 그렇게 최종의 글씨가 완성되어진다. 정형화된 글씨 이상의 유니크한 글씨가 만들어지면서 내 마음속에서도 만들어지는 자긍심과 뿌듯함. 그러면서도 그놈의 자긍심과 뿌듯함이 걸어가게 만들 아직도 예측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나의 삶이 두렵다. 내가 사진작가로 살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한때는 사진작가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내게 주어진 어느 호칭보다 가장 듣기 좋은 호칭으로 "작가님"이 되어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 세대의 평균연령은 50을 넘지 못했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사촌형제들의 평균연령 또한 50이 허용한계선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사촌형제들과 친형제들의 나이가 50을 넘기 시작하였지만 어쩌면 내게도 유전적으로 따라올 수 있는 내 삶의 허용 잔존연수는 10년 안팎이 될 수도 있다. 뭘 그리 내 스스로에게 더 찾아낼 것인지 나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냥 모른 채 살다 죽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모르는 체 살다 죽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모르는 것보다는 나를 알고 죽는 것이 나을까? 나를 알고 나를 찾아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단지 그걸 찾아내는 과정에서 돈벌이에 치중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열두 가지 재주 가진 놈이 밥 굶는다는 뜻이 과연 그럴 것인가? 그래서 나도 그 많은 재주들 때문에 밥 먹고 살기가 변변치 않은 것일까? 아직 내가 가진 크리스탈의 뻗어 나가는 가지가 많은데 굳이 나를 세공해서 정형화시켜 값어치가 먹여지는 세공된 보석이고 싶지 않다. 현자들은 나를 잘 다듬어 보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크리스탈 결정체들의 변수를 더 발견하고만 싶다. 그래서 남들이 나를 말할때는 누구나에게 말하는 '네 똥 굵다'는 소리보다는 '네 똥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이고 싶다. 글 김재중 사진 위선진 http://ZZIXA.NET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