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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녀석을 만났다. 정말 신기하리만치 나를 닮았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때로는 헝클어진 머리로 그리고 수염 기른 모습까지도 보인다.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간혹 무서울 만큼 나와 닮아 있는 그의 형체를 본다. 내가 그에게 다가갈수록 그의 존재감이 분명해지며 그에게서 멀어질수록 그의 존재감 또한 멀어진다. 매일같이 나와 패션코디도 맞춘다. 스키니 바지가 제일 잘 어울리고 때론 말끔하게 차려 입은 정장이 잘 어울린다. 비교적 흔한 옷차림새는 아닌 듯 보인다. 그는 침묵뿐이다.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본적이 있으나 그의 말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다. 그는 암흑이다. 그의 눈두덩이를 본 적은 있으나 그의 눈빛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분명 나와 같은 사고를 할 거라 확신한다. 나와 너무도 닮은 도플갱어가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내 삶의 회의를 느끼게 될 것 같다. 정말 친구 같은, 아니 나 같은 그를 다시는 보지 않으련다. 내게 아무리 애원을 한다 해도 나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리라. 그의 존재를 몰랐다면 모를까 나의 도플갱어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가 되질 않는다. 생김과 체형과 의상과 몸짓까지도 똑같은 그가 나와 생각이 다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항상 무채색의 옷만 입는다. 물론 나도 무채색의 옷을 주로 입는다. 자세히 살펴보면 채도가 다소 떨어지는 굉장히 다양한 색상과 패턴을 가진 옷을 입고 있다. 아니, 한순간에도 수십 번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나 스타일만큼은 언제나 나와 똑같다. 그는 겸손하다. 단 한 번도 내 위에 군림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도 그의 도플갱어 관계일 텐데 그래서 한 번쯤은 나에게 대적해 볼만한데 나만큼의 자신감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가지지 못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초능력자다. 분신술을 쓴다. 머리털도 나를 닮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손오공이 머리털 뽑아 여럿으로 나뉘듯이 둘로 나뉘기도 하고 수십으로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존재감의 중요성을 배웠다. 나뉘어 질수록 그의 존재감은 사라져간다. 분신술을 씀에도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아이러니함이 가슴 아프다. 존재감. 존재감. 그건 내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내 가치관이 아니던가! 차라리 존재감 강한 나로 남고 싶다. 그처럼 분신술의 능력이 주어진다 해도 나는 유일무이한 나로 남고 싶다. 그는 또 하나의 초능력을 소유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키를 한 치라도 더 늘일 수 있겠느냐?' 그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키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내가 아는 한 신조차도 인간에게 시도해본 적 없는 그런 능력을 그는 가지고 있다. 여자들도 부러워하는 다리의 라인을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그는 순정만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다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그 걸음걸이 또한 얼마나 도도한지 모른다. 항상 가까이 있었다고 그가 내게 말한다. 아니 그는 말을 못한다. 그렇게 그의 도플갱어인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내 곁에 존재하지만은 않았다. 울다 지쳐 잠들 때 그는 내게 없었다. 빗속을 울며 걸을 때 그는 내게 없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외로움의 길거리에서 누구 하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는 결코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 내가 그에게 편지를 쓰듯이. 그의 편지를 읽는다. 나와 필체가 똑같다. 나와 문체도 똑같다. 역시 그는 나의 도플갱어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도플갱어를 발견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가로등 아래 종이는 하나건만 펜은 둘이다. 내 친필서명을 각인한 금장만년필 촉과 내 도플갱어의 무채색 만년필 촉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그에게 쓰는 편지를 접고 이제 그만 술이나 한 잔 하자 해야겠다. 술값은 내가 내리라. 그의 무채색 돈은 받지 않을 터이니. 이봐, 친구! 한 잔 하자구!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그리고 그는 예술적인 긴 다리를 뽐내며 내 발밑을 따라올 것이다. 나의 도플갱어 나의 그림자. 글/사진 김재중 http://zzixa.net http://facebook.com/zzi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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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다 더 강렬한 것은 언어이고, 언어보다 더 강렬한 것은 가슴이고, 가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좆 같은 인생이어라 글 김재중 http://zzixa.net http://facebook.com/zzi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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