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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혼남이다.


나는 이혼남이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보이는 연애/결혼상태의 표기에는 이혼이라고 표기된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비공개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내 블로그에서는 "이혼남의 결혼이야기"가 연재되고 있고, 내 글 곳곳에서는 내가 이혼남임을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내가 이혼남임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내가 그것을 씻을 수 없음이기도 하지만 내가 가진 내 생각과 감성의 범위가 그만큼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는 이혼남/이혼녀들이 즐비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걸 당당하게 내어놓고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만은 그것을 당당하게 내어놓고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내 연애상태는 비공개로 되어 있다. 나를 알기 전에 내 전제를 먼저 평가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 이별, 결혼, 이혼, 그리움, 외로움, 다시 사랑, 그리고 또 이별...... 결코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언제나 반복되어진다. 내가 찍는 사진과 글에는 그러한 내 인생이 전제가 되어 있다. 그러한 것들을 숨기고 내가 그러한 사진들과 글을 쓰고 있다면 나는 거짓 위선자이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사랑과 행복에 대해서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내 뱉는 말들을 보고는 혹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니깐 이혼했지!" 아니다. "이혼했기에 그런 것이다!" 나의 예술은 나의 이혼으로부터 출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결혼생활이었다. 만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다면 이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여느 부부들처럼(내가 알고 있는) 그저 그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이혼하지 않고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혼이 나를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내게 정신과적 치료를 권했다. 술냄새를 풍기며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나는 알코올에 절어 손을 떨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해 버릴 생각도 했었고 그 죽음의 늪과 오한 속에서 육체와 영혼을 떨며 살아야했다.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 속에 나는 "이혼남"이었다. 자격지심이라고 스스로가 말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내 가까웠던 사람들 또는 멀었던 사람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그런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있는가? 단 한 번도 사회적 잣대 속에 그어진 "이혼남"의 경계 안으로 나를 집어넣은 적이 없다면 내가 오늘 그에게 술 한 잔 대접하리라. 나는 눈동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선글라스를 끼고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보았고, 매일마다 찾아오는 밤의 적막 속에서 눈물로 잠자리에 들었다. 내리는 빗소리에 치를 떨어야했고 잠들지 못하는 매일을 술로 연명하며 나를 기절시켜야 했다. 그런 중에서 나는 카메라를 들고 길거리로 나섰다. 밤 그리고 눈 그리고 비 그리고 쓸쓸함! 나는 나를 예술가라 불러주는 친구를 만났고 나의 감성을 적셔줄 노래를 만났고 나의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용기를 만났다. 나를 예술가라 불러주는 잊혀진 가수 김기주는 언제나 내 감성을 적셔주었고, 나의 감성을 적셔주는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홀로 외롭지 않다는 용기를 주었고, 나의 용기를 북돋아 준 조선희의 "왜관 촌년 조선희, 카메라와 질기게 사랑하기"는 나를 다시 길거리로 내몰았다. 그리고 길거리에 내몰린 내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나를 찍었다. 길거리에 놓인 나 같은 것들을 찍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버려진 나 같은 피사체들을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붙들고 숱하게 울었다. 그러나 내 눈물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비가 오는 날이었고 언제나 눈이 오는 날들이었다. 그 죽음의 장막이 깔린 것 같은 세상을 나는 누비고 다녔다. 그 죽음의 장막이 나를 뒤덮을 때 나는 죽음의 피맛을 보았다. 나는 그렇게 예술이란 것을 배웠다. 나의 예술은 그렇게 태어났다. 예술이란 단어가 낯부끄러웠다.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작가라는 호칭을 쓰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면서 나는 어설픈 감정느낌을 어설프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살았건만, 이제는 업무적으로 촬영하는 사진에서조차 내 감정이 없으면 카메라를 내려놓기도 한다. 물론, 사족을 달자면 그냥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만큼만 촬영한다는 소리로 변명을 해본다. 내가 살아온 날들의 내 가슴 속에서 느끼는 것들을 사진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세상의 아픔 속으로 뛰어들었다. 길거리에 있는 내가 아닌 세상 속에 있는 나를 찾아 나섰다. 장애인, 어린 아이, 가난, 아픔, 그리고 부러운 행복, 부러운 사랑...... 그런 것들이 나의 피사체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가슴을 저며 낸 사진들을 대하면서 또한 나는 숱하게 울었다. 그런 사진들을 내놓으면서 나는 내 사진만으로도 부족한 잔변감을 느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가 아니어도 좋다. 수필이 아니어도 좋다. 그냥 내가 내뱉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죽음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작가님이란 호칭이 따라붙었다. 낯부끄러웠다. 그렇게 낯부끄러웠다. 또 그렇게도 낯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진짜 작가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또 나는 세상에 당당해야만 했다. 내 글과 사진에는 내 이름이 들어있어야만 했다. 부끄러웠다. 소위 배웠다는 자들의 시각에는 내 글과 사진이 어떠할지에 대한 자격지심과, 글이 무엇인지 사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 스스로의 문제로 부끄러웠다. 그 속에서 내 글과 사진이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가슴을 위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글과 사진으로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다시 살게 될 용기를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 글과 사진이 혼자만 외롭지 않다고 알게 해주는 그 외로움의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글과 사진 속에 있는 내 정서를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더 없이 내 가슴을 내어놓아야 했으며 그렇게 내어놓은 가슴에 좀비들의 말 한 마디 속에 무른 가슴은 여지없이 상처를 입었다. 배고픔 따위는 그러한 것들에 비하여 아무런 아픔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세상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면서 나는 더욱 외로워졌다. 그것은 예술가로의 외로움이었다. 유명해지고 누군가 알아주는 것 이상의 정작 내 영혼을 달래줄 것들이 필요했다. 세상이 그어놓은 잣대가 아닌 그냥 내 가슴을 진정으로 바라보아줄 그런 친구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오늘 나는 그 자리에 서 있다. 바로 당신 앞에. 글/사진 김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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