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온함]
다 지난 일인데 태연해졌다 생각을 했는데 마음이 태연해졌다 생각을 했는데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결코 태연해지기는 쉽지가 않다.
아니 어쩌면 태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벌써 소주 병나발이라도 불었으련만
오늘은 소주병 대신 펜을 들지 않았던가.
적응되어가고 무디어져 간다는 것 또한
참으로 무정한 일이면서도 또한 비참한 일이다.
마치 사랑의 유효기간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지는
호르몬 분비의 중단 같은 것처럼.
외로움도, 가슴 아픔도, 서러움도
무디어질 수 있다는 것이 서글프다.
그렇게 또 한 번 무디어지고 메말라진 가슴이 될까 두렵다.
그렇게 무디어지고 메말라가다가는
가뭄속 논두렁 바닥 갈라지듯이
내 영혼도 강퍅해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어느 곳을 가게 되던, 적응되고 나면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간섭해대는 오지랖질 덕분에
항상 리더의 역할을 하며 살았던 내가 당해야 했던 강퇴처분처럼
그 외로움과, 가슴 아픔과, 서러움들에 적응되어 버리기 전에
수많은 글로 내뱉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뱉고 나니 조금은 편해졌다 생각을 했는데
편해졌다기보다는 적응되었다는 생각을 하고나니 이 또한 가슴이 아프구나.
결국은 사랑만이 만병통치약인 것일까?
또 다른 사랑만이 지금의 이율배반적인 평온함에 대한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까?
무너져 내리는 가슴팍 끌어안고는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니
이 가슴팍에 평온함을 달라며
옷가지들을 도배풀 먹인 것 마냥 눈물 콧물 범벅으로 만들며
기도를 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얼마간의 평온함마저도 이 공허함을 이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새벽 5시로 달려가는 초침소리와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 소리와
만년필의 종이 긁어대는 소리가
3중주가 되어 이 어둠의 적막감 속에서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화성을 자아낸다.
4분음표를 1분에 60번을 정확하게 찍어주는 메트로놈 같은 초침소리에
타악기 연주자의 애드리브 같은 엇박자 소리로 들려오는 빗방울 두드리는 소리가 곁들여지고
현악기의 활처럼 현란하게 움직이는, 아니 같은 음악을 두고도 제각각 달라지는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처럼
때로는 16분음표의 숨 가쁜 리듬감으로 흐르다가
생각과 표현을 하느라 길어진 페르마타에
메트로놈 소리와 타악기 소리마저 잠재울 듯 깊은 적막감으로 빠져드는 지휘자의 파우자같은 시간들.
그 적막감의 제너럴 파우자 뒤로 이어지는 포르테피아노의 거친 필체 뒤에 머뭇거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만년필 촉 긁히는 소리 그렇게 종이를 긁어대는 지휘봉의 바람 가르는 소리 속에 새까만 눈물 흘려대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느닷없이 재즈관악기처럼 울려대는 냉장고의 냉각펌프 소리를 따라가서는 유리잔에 물채워 연주하는 연주자처럼 소주잔에 소주나 채워야겠다.
글/사진 김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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