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과 만년필을 꺼내 앉은 주점의 발코니
부서진 빗방울이 안개처럼 날아 들고,
열대의 슬리퍼 대신 신은 가죽부츠 밑으로는
하얀 타일에 빗물이 저벅저벅 고여 있다.
입다물던 만년필의 촉이 말라버려
한껏 휘둘러 잉크를 밀어냈다.
까만 토악질이 바닥에 흩뿌려져
방울방울 기다란 점선을 그렸다.
내 영혼처럼 마른 촉에서 나온 잉크는
비에 젖은 새하얀 바닥에 내려앉아,
먼 바다에서 떠밀려온 너울처럼
정체성을 잃고 퍼져 나간다.
진한 자욱 남기려 했던 내 인생은
묽은 흔적뿐인 잉크방울 되어
내일이면 점원의 걸레질에 닦여버릴
정체성 앓이를 하고 있다.
잃음과 앓음의 곯마름에
뜨거운 테킬라를 붓는다.
그리곤 불타는 속을 달래려
차가운 맥주를 마신다.
발악처럼 말하고 팠던 것들은
까만 토악질이 되어 버렸고,
비 내린 도화지 위에 남은
거무튀튀한 흔적에 주정한다.
내가 남느냐
네가 나를 먹느냐
결국 남을 것은 숙취 뿐인 것을!
글/사진 김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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