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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생각 하나 (이드-자아-초자아)


프로이트가 사람의 정신세계를 구분 지었단다. 이드 - 자아(에고) - 초자아(수퍼에고) 예술행위는 이 구분되어진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들을 아우르는 일탈이 필요하다. 예술행위의 가장 적대적인 관계는 이성적 판단이다. 자아와 초자아를 넘어선 이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일탈이며, 그러한 일탈 속에서 자아와 초자아를 통해 쌓아온 삶의 경험과 삶의 연륜을 적당한 기교와 수단을 빌어서 인간의 원초적인 면을 꼬집어 내는 행위가 필요하다. 적당한 수단은 예술의 분야가 될 것이며, 적당한 기교는 예술의 기법이 될 것이며, 일탈이 바로 그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행위이다. 그 일탈 속에서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대리만족감을 얻어낸다. 이드를 잠재우도록 교육받은 이성적 판단 속에 잠재된 자신의 이드를 누군가가 대신하여 꺼내어줄 때 그 쾌감을 느낀다 할 수 있다. 나는 일탈을 사랑한다. 일탈이 없는 예술은 그저 듣기 좋고, 보기 좋은 기술의 난무함이다. 나는 일탈을 사랑한다. 일탈이 없는 예술은 관객의 심부름 행위이다. 예술가로서의 일탈이 없는 예술행위를 나로서는 예술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저 보기 좋은 떡과 듣기 좋은 꽃노래라고 치부하고 싶다. "술 처먹고 개집이나 들어가 자네!"와 "술 마시면 개집에 들어가 잘 수도 있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관객이었으면 좋겠다. "밤새도록 술 처먹고 술 냄새 풍기며 교회를 나왔어?"보다는 "그렇게 술 처먹고도 교회를 나오는구나!"의 이해가 있는 관객들이길 원한다. 물론 양자 모두 술을 처먹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상의 진실을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이 필요하다. 행동과 생각과 사상을 제한하는 유교정신이 500년이나 지배한 나라에서 일탈하는 예술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러한 일탈을 예술로 승화시킨 선배들을 바라보면 존경을 감출 수가 없다. 일상을 함께해보면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조차도 "개"로 취급되어지는 세상이 안타깝다. 그럴수록 나는 스스로가 "개"가 되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배경이 없는 일탈행위는 못 배운 놈의 "개"짓거리에 불과한 현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장벽이다. 이러한 "개"로 비유되는 이드를 자아와 초자아로 다시 무장시킨다. 많은 경험과 생각과 판단과 현실에 대한 폭넓은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는 예술가이기보다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행위자이다. 그 걸어가는 길이 크게 빗나가지 않고 조금은 다른 예술로 조금 더 깊은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다. 너무 어렵지 않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무 고상하지 않게 나처럼 조금 못 배운 사람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 너무 동떨어지지 않게 나와 같은 조금 외롭고 아픈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너무 비겁하거나, 너무 다른 이상을 가지거나, 너무 이상주의적인 예술은 하고 싶지 않다. 철학과 인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예술을 정통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비록 학문적으로 바라보이는 예술의 깊이가 겉핥기를 한다해도 사람중심의 좀 더 드러내고, 좀 더 다가가고,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드 - 자아 - 초자아의 경계선을 이드 + 자아 + 초자아의 합일점으로 만들어 (이드 + 자아 + 초자아) * 이드의 일탈을 꿈꾸는 관계식으로 만들고 (이드 + 자아 + 초자아) * 이드 * 감성이라는 혼을 불어넣어 ((이드 + 자아 + 초자아) * 이드 * 감성) ^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 사람이야기! 그러나 그 것이 아무런 색깔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닌 더블 에스프레소처럼 속쓰림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느낌"과 "잔상"을 남기고 싶다. 글/사진 김재중 http://zzixa.net (사진 속 인물 :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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